완벽(完璧)
완벽(完璧) 完:완전할 완. 璧:둥근 옥 벽. [동의어] 완조(完調). [유사어] 화씨지벽(和氏之壁), 연성지벽(連城之壁). [출전]《史記》〈藺相如列傳〉,《十八史略》〈趙篇〉 |
① 흠이 없는 구슬[壁:환상(環狀)의 옥(玉)]. 결점 없이 훌륭함. ② 빌려 온 물건을 온전히 돌려보냄. |
전국 시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은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는 천하명옥(天下名玉)을 가지고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어떻게든 화씨지벽을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곧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성(城) 15개와 맞바꾸자'고 제의했다. 혜문왕에게는 실로 난처한 문제였다. 제의를 거절하면 당장 쳐들어 올 것이고 화씨지벽을 넘겨주면 그냥 빼앗아 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혜문왕은 중신들을 소집하여 의논했다.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결국 강자의 비위를 거스를 수 없다 하여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혜문왕은 중신들에게 물었다. "사신으로는 누가 적임자일 것 같소?" 그러자 대부인 목현(繆賢)이 말했다. "신의 식객에 지모와 담력이 뛰어난 인상여(藺相如)라는 자가 있사온데 그 자라면 차질 없이 중임을 완수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이리하여 사신으로 발탁된 인상여는 소양왕을 알현하고 화씨지벽을 바쳤다. 화씨지벽을 손에 들고 살펴보던 소양왕은 감탄하여 희색이 만면했으나 약속한 15개 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내비치지 않았다.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인상여는 조용히 말했다. "전하, 그 화씨지벽에는 흠집이 있사온데 그것을 외신(外臣)에게 주시면 가르쳐 드리겠나이다." 소양왕이 무심코 화씨지벽을 건네주자 인상여는 그것을 손에 든 채 궁궐 기둥 옆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소양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전하께서 약속하신 15개 성을 넘겨주실 때까지 이 화씨지벽은 외신이 갖고 있겠나이다. 만약 안 된다고 하시면 화씨지벽은 외신의 머리와 함께 이 기둥에 부딪쳐 깨지고 말 것이옵니다." 화씨지벽이 깨질까 겁이 난 소양왕을 일단 숙소로 돌려보냈다. 인상여는 숙소에 돌아오자 화씨지벽을 부하에게 넘겨주고 서둘러 귀국시켰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양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인상여를 잡아죽이려고 했다. 그러나 그를 죽였다가는 신의 없는 편협한 군왕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 같아 그대로 곱게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화씨지벽은 '온전한 구슬[完璧]'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인상여는 그 공으로 상대부(上大夫)에 임명되었다. |
와신상담(臥薪嘗膽)
와신상담(臥薪嘗膽) 臥:누울 와. 薪:섶(땔)나무 신. 嘗:맛볼 상. 膽:쓸게 담. [유사어] 회계지치(會稽之恥), 절치액완(切齒扼腕). [출전]《史記》〈越世家〉 |
섶 위에서 잠을 자고 쓸개를 핥는다는 뜻으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고난을 참고 견딤의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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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勾踐)과 취리[ 李:절강성 가흥(浙江省嘉興)]에서 싸워 크게 패한 오왕(吳王) 합려(闔閭)는 적의 화살에 부상한 손가락의 상처가 악화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었다(B.C. 496). 임종 때 합려는 태자인 부차(夫差)에게 반드시 구천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고 유명(遺命)했다. 오왕이 된 부차는 부왕(父王)의 유명을 잊지 않으려고 '섶 위에서 잠을 자고[臥薪]' 자기 방을 드나드는 신하들에게는 방문 앞에서 부왕의 유명을 외치게 했다. "부차야, 월왕 구천이 너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때마다 부차는 임종 때 부왕에게 한 그대로 대답했다. "예, 결코 잊지 않고 3년 안에 꼭 원수를 갚겠나이다." 이처럼 밤낮 없이 복수를 맹세한 부차는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면서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참모인 범려(范 )가 간(諫)했으나 듣지 않고 선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월나라 군사는 복수심에 불타는 오나라 군사에 대패하여 회계산(會稽山)으로 도망갔다. 오나라 군사가 포위하자 진퇴양난에 빠진 구천은 범려의 헌책(獻策)에 따라 우선 오나라의 재상 백비(伯 )에게 많은 뇌물을 준 뒤 부차에게 신하가 되겠다며 항복을 청원했다. 이때 오나라의 중신 오자서(伍子胥)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쳐야 한다'고 간했으나 부차는 백비의 진언에 따라 구천의 청원을 받아들이고 귀국까지 허락했다. 구천은 오나라의 속령(屬領)이 된 고국으로 돌아오자 항상 곁에다 쓸개를 놔두고 앉으나 서나 그 쓴맛을 맛보며[嘗膽] 회계의 치욕[會稽之恥]을 상기했다. 그리고 부부가 함께 밭 갈고 길쌈하는 농군이 되어 은밀히 군사를 훈련하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회계의 치욕의 날로부터 12년이 지난 그 해(B.C. 482) 봄, 부차가 천하에 패권(覇權)을 일컫기 위해 기(杞) 땅의 황지[黃地:하남성 기현(河南省杞縣)]에서 제후들과 회맹(會盟)하고 있는 사이에 구천은 군사를 이끌고 오나라로 쳐들어갔다. 그로부터 역전(歷戰) 7년만에 오나라의 도읍 고소[姑蘇:소주(蘇州)]에 육박한 구천은 오와 부차를 굴복시키고 마침내 회계의 치욕을 씻었다. 부차는 용동[甬東:절강성 정하(定河)]에서 여생을 보내라는 구천의 호의를 사양하고 자결했다. 그 후 구천은 부차를 대신하여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 |